critique - 4

형식과 내용을 초월한 예외적인 예술가


이준희 ∥ 건국대학교 현대미술과 겸임교수


“이미 동양화의 한자 자체가 지닌 서예적 추상은 그 자원(문자의 근원)이 자연 사물의 형(태)을 빌린 것과,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동양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때 ‘무형이 유형’이라는 동양의 철학적인 언어가 발생되며, 그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이다. 글씨가 아닌 획(劃)과 점(點)이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구성해 나가는 무형의 발언이다. 몇 가지 덧붙인다면 내가 빌려 표현하는 자연물질과의 융화는 또한 나의 생명인 예술의 반려자이다.” 
-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열린 이응노 개인전 도록에 수록된 고암의 서문 중.

2000년 고암미술연구소에서 발행한 책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얼과 알)이 있다. 여기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 관장)는 고암을 일컬어 ‘확실히 예외적인 작가’라고 규정했다. 2012년 제정된 고암미술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오윤석 역시 그러하다. 단편적이고 정형화된 수식어로 그를 규정 지울 수 없다. 작품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예외적이다. 부연하자면 형식, 즉 조형적인 측면은 그나마 여느 현대미술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견 보편적인 어법이라 하겠다. 반면 내용 면에선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초월적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이라는 명제와도 확연히 다르다. 그 특이성은 기존 미술사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보편성보다 예외적인 개별성이 두드러진 까닭이다.
지금까지 오윤석이 발표한 작품은 패인팅보다 드로잉에 가깝다. 대체로 면(面)보다 선(線), 색(色)보다 형(形), 그리고 정(靜)보다 동(動)적인 감각이 앞선다. 일견 편향적이라 하겠다. 그리기로 구현된 이미지보다 (칼로) 오려내고 다시 꼬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과정이란, 염원(念願)과 기원(祈願)이 담긴 주술사의 읊조림이요, 구도자의 ‘수행(修行)’과 다르지 않다.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은 몰입과 집중력의 결정체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결과물이다. 이는 곧, 깨어있는 의식에 통제되는 이성(理性) 너머 세계, 자아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무의식을 드러내는 일이다. 황홀경(怳惚境)의 세계다.

행위로 구현한 수행(修行)의 이미지
오윤석 첫 개인전은 2003년. 이후 2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다. 대략 일 년에 한 차례씩 빠짐없이 열린 셈이다. 성실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작업 여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은(銀)을 주요 매체로 다룬 초기 작업(2003~2005). 둘째, 문자(文字)를 분해하고 재조합함으로써 그것을 물질화된 이미지로 번안(飜案)하는 작업(2007~2012). 그리고 최근까지 매진하고 있는 <감춰진 기억 Hidden Memories>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연작은 비구상 추상회화부터 설치와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형식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작품 속에 담긴 내용은 과거 작품과 대동소이하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두 일맥상통한다. 오윤석은 자신의 작품이 ‘굿’이나 ‘부적’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작업과정은 샤먼의 주술 행위와 다르지 않고, 결과인 작품은 ‘치유’를 염원하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초기작 <정화하다 1>(2003)과 <소통하다 0401, 0402>(2004), 그리고 <묻힘-열림>(2003)과 <은-닮다>(2004)는 은(銀, silver)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은은 연금술사의 호기심을 자극해 온 신비로운 물질인 금에 버금가는 귀한 금속이다. 차갑고 냉철한 특유의 빛을 발광한다. 독성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성도 지녔다. 이런 까닭에 해독(解毒) 기능을 지닌 물질로 오래전부터 사용돼왔다. 교환가치를 지닌 화폐로도 쓰였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탐욕을 거래하는 물신주의의 주요 매개체였다. 긍정과 부정,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 생성과 파괴, 양과 음 …. 은은 세상 이치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소재다. 한 몸에 두 얼굴을 지닌 격이다. 겉모습이 비슷한 알루미늄 포일이나 은가루(銀粉)를 사용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은의 본질을 소통(疏通)과 정화(精華)로 파악한 것이다. 초기 작업의 의도가 헤아려지는 대목이다. 확장되는 이후 작업세계의 이면을 감지할 수 있는 단서다. 
두 번째 시기는 ‘시그니처 스타일(signature style)’이 확립된 단계다. 문자-형상을 칼로 오려내고 다시 꼬는 작업방식을 말한다. ‘칼 드로잉’이라고도 한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불교 경전 <금강경(金剛經)>을 비롯해 고암의 <군상(群像)> 등 시/서/화(詩/書/畵)가 어우러진 고전(古典)을 근거로 삼았다. 예로부터 문자는 의미를 상징하는 기호, 뜻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특히 ‘상형문자(象形文字)’인 한자(漢字)는 원형이 그림과 맞닿아있다. 오윤석은 이 한자-글씨를 칼로 오려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자가 지닌 원초적 기능은 퇴색된다.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기능이 축소된다. 대신 형태를 지닌 조형적 요소가 부각 된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탈바꿈. 시각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화면에 구멍이 생기면서 2차원 평면이 지닌 아우라도 무너진다. 글자 모양대로 뚫린 구멍으로 공기가 흐른다. 빛이 투과되고 그림자가 드리운다. 3차원 공간감이 드러난다. 허공에 매달린 종이는 미세하게 흔들리며 움직인다. 숭숭 구멍 뚫린 한지-종이처럼 벽면에 비친 그림자 또한 작품이 된다. 평면 → 정면 → 고정 → 읽음은 입체 → 측면 → 움직임 → 바라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실제와 허상, 물질과 비물질, 육체와 정신, 과거와 현재, 비움과 채움, 원본과 차용…. 세상의 모든 경계에서 의문을 던진다. 오윤석은 이런 경계지점에서 이미지를 제 맘대로 갖고 논다. 

액자작품도 평면이긴 하되 완벽한 평면은 아니다. 거친 표면이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표면에서 발산되는 질감은 시각에 앞서 촉감(觸感)으로 전달된다. 거친 텍스쳐(texture), 불규칙한 마티에르(matière) 때문이다. 예리한 칼로 오려진 부분은 평면에 대비된다. 수직으로 세워져 돌출되면서 평면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래서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 볼 때 제각기 체험하는 화면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미시와 거시, 부분과 전체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오윤석은 말한다. “‘칼-드로잉’ 작업은 동양적 사유가 어떻게 현대미술과 조우할 수 있는지의 실험”이고, “동양이 직관적이고 영적인 사유 체계를 시각화시키려는 관심”이라고. 서양 중세시대 수도사는 성서를 필사하며 수행했다. 오윤석은 동양 고전과 경전을 칼로 오려내면서 분해, 재조립한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엄청난 시간과 고행에 가까운 노동력 없인 불가능하다. 오윤석이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수행방법이다. 다른 현대미술 작품과의 예외성이고 차별성이다. 
최근까지 매진하는 작업은 <감춰진 기억 Hidden Memories> 시리즈. 이 가운데 가중 주목되는 작품은 <감춰진 기억 – 01>이다. 동영상이 상영되는 모니터와 회화작품이 한 쌍을 이룬다. 회화작품은 언뜻 단색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큐레이터 이윤희는 이런 회화작품을 일컬어 “오윤석의 작품에서 감추어진, 그러나 감추는 과정이 공개된 기억들은, 현상의 이면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또 다른 질서에 관한 것”이라며, “시간의 더께를 입어 서사가 가득 찬 이미지들을 담은 단색 화면들은, 최대한의 내용을 담은 채 최소한의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동시대 미술이 제시하는 문법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집단무의식과 연관된 형상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방식으로 그는 추상적 화면을 선택했고, 따라서 그의 빈 화면은 그저 비어 있지 않고 꿈틀거리는 서사로 가득하다”고 평가한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러닝 타임 4분 33초짜리 싱글 채널 동영상은 2012년 처음 선보였다. 최근까지 같은 형식 작품이 계속 제작되고 있다. ‘4분 33초’. 이 대목에서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가 떠오른다. 침묵의 소리, 연주하지 않는 연주, 소리 없는 음악을 선보인 전위 예술가다. 연상은 백남준(1932~2006)으로까지 이어진다. 백남준은 1990년 서울에서 먼저 간 동료 존 케이지를 추모하는 한판 굿 퍼포먼스를 펼쳤다. 요란하고 시끌벅적했다. 무악(巫樂)과 피아노, 심지어 요강과 곰방대까지 동원됐다. 산 사람-백남준이 죽은 사람-존 케이지를 위해 펼친 진혼곡이었다. 침묵의 예술을 을 추념하는 전복(顚覆)과 반전(反轉)을 연출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오윤석의 <감춰진 기억 – 01>로 돌아오자. 이 또 한 침묵이다. 오직 움직임만 보인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들린 듯 팔을 휘저으며 화면 위에 선을 긋는 소리, 작가의 거친 숨소리는 무음(無音)으로 배경에 깔린다. 그래서 오히려 화면에 올곧이 집중된다. 존 케이지 4분 33초는 현재의 기록이었다. 그의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 방향으로 흘렀다. 반면 오윤석의 시간은 과거를 향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거꾸로 되돌아간다. 시간을 거스르는 역행(逆行)이다. 새까맣게 칠해졌던 캔버스는 차츰 텅 빈 캔버스로 변한다. 레이어가 중첩된 그림은 한 꺼풀씩 벗겨진다. 종착점에서 출발점으로 다시 향한다. 끝에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형국이다. 얼핏보면 영상 속 오윤석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반대다. 그림을 지우는 것처럼 보이도록 영상을 거꾸로 되돌려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리는 행위를 지우는 행위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영상 속에 보이는 장면은 그림과 지움이 한 몸이다. 그리는 몸짓이 결국 그림을 지우는 꼴이 된다. 윤회(輪廻)와 같다. 사람과 시간이 만드는 풍경 속에서 그림이 돌고 돈다. 
“사막에서 길을 잃다”는 맞는 말인 동시에 틀린 말이다. 애초 사막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생 텍쥐베리. 그는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니라 마음의 길을 찾았다. 그의 발자국은 곧 길이 됐다. 예술가란 모래바람에 덮여 금방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막에 길을 내는 사람이다. 오윤석도 그렇다. 사막에 길을 내는 사람이다. 무모함에 도전하는 예술가다. 따라서 오윤석의 작품은 사막 위에 만든 길과 같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 말처럼, 오윤석 작품이 유의미한 존재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용과 형식을 초월한 열린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